말이 올무가 되지 않게 하라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 느끼신 강렬한 슬픔을 기록한 요한복음의 구절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요한은 단지 이렇게 기록할 뿐이다.“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Jesus wept 요11:35)
성경을 무수한 절로 나눈 학자들은 이‘두 단어’가 하나의 절로 독립하도록 그대로 두는 탁월한 미적 감각을 발휘했다. 친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해 이두단어에 다른 것을 더 붙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유사한 예를 들자면,세상을 흔들어 놓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단지 ‘네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여기서 ‘네 단어’라 함은 영어 본문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역자 주)“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There they crucified him, 요19:18) 오늘날의 얄팍한 소설가나 극작가가 이토록 엄청난 사건에 대해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거창하게 준비해서 요란하게 나팔을 불어댈 것을 생각하면 약간 소름이 돋지 않는가? 그들은 그토록 엄숙한 사건을 무대 위에서 재연하기 위해 수천달러의 비용을 쏟아 붓고 수십 페이지짜리 대본을 만들지 않겠는가?복음서 기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마음으로 강렬하게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것에 대해 몇 개의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또 생각해보자면, 우리 주님의 부활을 알린 간결한 표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가 살아나셨고”(He has risen,막16:6) 이 말은 사실을 알기 원했던 제자들에게 한 천사가 부활에 대해 ‘세 단어’로 말해준 것이다. 부활 같은 놀라운 사건을 알리기 위해 달변의 예비적 설명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면 수많은 단어를 동원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어떤 것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에도 너무 보잘 것 없을 때에만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다.
공허한 말을 주의하라
대부분의 신앙인은 제대로 된 행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하려고 말을 자꾸 늘리는 잘못을 범해왔고, 아마도 이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이런 잘못을 가장 많이 범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잘못을 범해왔다는 사실이 이런 잘못을 앞으로도 계속 범하는 구실로 작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로 이 모든 문제를 직시하고,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얄팍한 달변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곳은 바로 기도회이다. 평소에 아주 천천히 말하는 사람도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는, 특히 옆에 청중이 있을 때에도 신기할 정도로 유창해진다. 나는 기도실에서 아주 현란한 표현을 구사하는 기도 소리를 많이 들어왔고,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도 그런 기도를 많이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혜 없는 말을 계속해야 할 이유는 없다.
설교자이든, 그의 말을 듣는 청중이든 알맹이 없는 공허한 말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意識)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임하셨을 때 그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유창해지는 경우가 있긴 하다. 영혼의 경외심과 고요함에서 솟구쳐 나오는 능력의 말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눈물과 행동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의 달변은 내가 이글에서 지적한 그런 달변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달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나오는 공허한 말들은 지금보다 팍 줄여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서55장8,9절)
「하나님의 길에 우연은 없다」A.W.토저